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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명예의 전당

불꽃 명예의 전당

한화이글스의 추억과 영광의 순간들을 함께하세요!

제 7구단의 태동(1981~1985)

1981년 7월 23일. 한국화약그룹(現 한화그룹) 창업주였던 현암 김종희 회장이 향년 59세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고(故) 김종희 회장은 1980년 천안북일고 야구팀이 창단 3년 만에 봉황기와 화랑기 대회에서 우승하자 실업야구단 창단을 약속하는 등 야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지닌 경영인이었다. 당시 고인의 운구를 맡았던 사람이 북일고 야구부의 김영덕, 이희수 전현직 감독과 이상군을 비롯한 선수들이었다는 점은 고인에게 야구가 어떤 의미였던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1982년 3월 27일.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각 지역별 연고지를 바탕으로 6개 구단이 창단을 준비하는 동안 한화그룹이 그룹 총수의 별세로 갑작스런 경영권 승계 과정을 밟느라 경황이 없던 사이, 연고지로 희망하는 기업이 없었던 충청권은 ‘3년 후 서울 이전’ 약속과 함께 두산그룹(OB 베어스)에게 맡겨졌다. 1982년 10월. 프로야구 창단 첫 해 충청권을 연고로 창단해 북일고 우승의 주역이었던 김영덕 감독이 지휘한 OB 베어스가 한국시리즈를 차지하였다. 그 해 프로야구가 예상 밖의 흥행에 성공하자 10여 개의 기업들이 프로야구단 창단 의사를 밝히게 되는데, 선대 회장의 뜻을 이어받은 김승연 회장의 한화그룹 역시 적극적으로 창단 준비를 서둘렀다. 1984년 10월 29일. 충남 도지사가 ‘충청권 연고 프로야구 제 7구단의 조속한 창설’을 요청하는 공문을 내무부에 접수하자, 내무부는 곧바로 그에 대한 회신을 KBO에 지시했다. 기존 6개 구단들이 추가 창단에 거부감을 보였지만, 충청 지역이 앞서 움직이자 KBO도 ‘연말까지 희망 기업의 창단신청서를 접수하겠다’는 내용을 회신했다. 그 해 연말까지 여러 기업들이 창단신청서를 접수했지만, 충청권 연고 구단 창설의 필요성을 등에 업은 한화그룹이 처음부터 가장 유력한 후보로꼽혔다. 1985년 1월 11일. KBO 이사회에서 한화그룹의 창단신청 승인이 결정되었다. 한화그룹은 프로야구 발전을 기원하며 야구회관을 건립하여 기증하였고, 그렇게 지어진 강남구 도곡동의 6층 건물에는 현재 KBO와 야구협회 등이 입주해 있다. 1985년 3월 2일. 대국민 공모를 통해 구단 이름이 ‘빙그레 이글스’로 결정됐다. 25,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약 10%인 2,500여 명이 응모하여 선정된 구단명이 바로 ‘이글스’였다. 1985년 3월 7일. 영남대, 동국대와 대학생대표팀을 이끌고 국내외 여러 대회에서 우승했던 배성서 감독을 초대감독으로 선임했다. 계약금 3천만 원과 연봉 3천만 원의 계약 규모는 당시 국내최고 수준이었으며, 3년의 임기가 보장된 다년 계약도 국내 최초였다. 1985년 3월 11일. 독립법인 ‘(주)빙그레 이글스 야구단’이 설립됐고, 8월 26일에는 초대 사장(노정호)과 단장(노진호)이 선임되었다.

외인구단(1985~1987)

1985년 5월 8~9일. 대전야구장에서 공개 입단테스트를 열어 20여 명의 선수들을 선발했다. 기존 구단들의 견제로 선수 확보가 어려워지자 짜낸 고육지책이었다. 그 해 봄에 대학을 졸업한 충청권 고교 출신 이상군, 민문식, 전대영과 삼성에서 지명권을 포기한 대구 출신 강정길, 이강돈을 입단시키고 롯데에서 현금트레이드로 이석규, 이광길, 김재열을 받아왔지만 달랑 8명으로는연습경기조차 치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85년 6월 3일. 다대포에서 첫 합동훈련이 시작됐다. ‘강한 체력이 있어야만 강한 팀이 될 수 있다’는 지론을 가진 배성서 감독은 UDT 조교 출신 박상조를 ‘체력담당코치’로 선임해 훈련을 맡겼고, 선수들은 5개월간 배트와 글러브를 만져볼 틈도 없이 다대포 백사장을 뒹굴었다. 그 와중에 공개 테스트를 통해 합류했던 사회인 출신 20여 명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짐을 쌌고, 끝까지 남은 선수들은 스스로를 ‘6.3동지회’라고 불렀다. 초창기 이글스 선수단의 강한 결속력의 핵심이 바로 그 ‘6.3동지회’였다. 1986년 2월 5일. 30승 기록의 재일교포 거물투수 장명부를 영입했고, 대학을 졸업한 국가대표출신 한희민, 김상국도 곧 합류했다. 앞서 1985년 9월에는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 2군 출신의 재일교포 외야수 고원부가 결합했고, 유승안, 김우열, 김한근, 박찬 등 각 팀에서 방출되다시피 한 선수들도 하나씩 가세했다. 장명부-이상군-한희민을 축으로 한 마운드와 유승안-김상국의 포수진, 그리고 강정길-이광길-전대영-김한근의 내야진과 이강돈-고원부-박찬의 외야진으로 대략적인 구성을 마친 셈이었다. 1986년 3월 8일. 대전야구장에서 창단식을 가진 뒤 대전역을 거쳐 도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저녁에는 보문산 전망대에서 1천여 발의 폭죽을 터뜨렸다. 다른 팀들이 코칭스태프와 선수 1차 영입이 마무리 되는대로 창단식을 열었던 것에 비해 꽤 늦은 일정이었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착실히 준비를 마친 뒤 완성된 진용을 팬들 앞에 내놓는다는 각오가 깔린 선택이었다. 어쨌든 창단식은 그대로 한 달 여 앞으로 다가온 프로무대 데뷔전을 향한 출정식을 겸하는 의미를 가지게 됐다. 그 날 창단식에 참석한 선수단은 배성서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 5명과 선수 47명으로 모두 52명이었다. 1986년 4월 1일. 대전구장 12,000석의 만원 관중 앞에서 MBC 청룡을 상대로 역사적인 첫경기를 치렀다. 그 날 선발투수 장명부가 5회까지 6점을 내주며 부진했지만 6회에 구원 등판한 한희민이 추가실점을 막아내는 사이에 타선이 12안타로 대추격전을 벌여 9회 말 8대 7, 무사 2,3루의 결정적인 역전 기회를 잡기도 했다. 결국 대타 김종윤이 삼진으로 물러나고 김상국의 우익수 플라이 때 홈으로 파고 든 3루 주자 이군노 마저 태그아웃 당하면서 아깝게 지긴 했지만 대전구장에 모인 홈팬들에게 인상적인 뒷심과 포기하지 않는 끈기는 박수 받을 만 했다. 1986년 4월 5일. 청보 핀토스와의 인천 원정경기에서 5대 0으로 승리하며 역사적인 창단 첫승을 기록했다. 그날의 수훈갑은 구단의 첫 승을 완봉승으로 장식한 선발투수 한희민이었고, 이강돈은 8회 초 2점짜리 쐐기홈런으로 프로무대 12타석 만에 자신의 첫 안타를 만들어냈다. 1987년 8월 21일./이정훈 22경기 연속안타 기록수립. 신인 이정훈이 22경기 연속안타를 때려내 이순철(해태)과 김광림(OB)의 기록(21경기)을 넘어서는 신기록을 작성했다. 이정훈은 타격재능과 근성을 겸비하고도 류중일과 강기웅 등에 밀려 연고팀 삼성의 1차 지명을 받지 못해 2차 지명대상으로 나오자, 배성서 감독과 노진호 단장이 ‘이정훈은 천천히 뽑아도 되지 않느냐’며 상대팀을 안심시키는 기지를 발휘하여 영입한 선수였기에 이정훈의 활약은 이글스 팬들에게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었다. 1987년 8월 27일. / 이강돈 프로 통산 2번째 싸이클링히트 기록(OB전) 이강돈이 한국프로야구 제 2호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했다. 이강돈 역시 대구상고 출신으로 삼성이 연고권을 가진 선수였지만 장효조, 허규옥, 장태수 등 좋은 외야수들이 넘쳐나던 삼성에서 이강돈의 자리는 많지 않았다. 고향 팀에서 ‘군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오라’며 문전박대를 받은 이강돈은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해 모진 훈련을 버텨내며 ‘6.3동지회’의 기둥이 됐고, 훗날 두 차례나 최다안타왕에 오르며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주역이 됐다. 1987년 빙그레 이글스는 청보 핀토스를 7경기차로 멀찍이 따돌리며 6위를 마크해 이전 해보다 프로구단으로서의 위용을 갖추며 상당히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역시 각각 18승과 13승을 올리며 더욱 발전한 이상군과 한희민이 마운드를 이끌었고, 팀 최초의 신인왕 이정훈과 역시 팀 최초의 골든글러버 유승안(지명타자 부문)이 타선을 이끌어준 결과였다.

돌풍의 신생팀(1988~1993)

1987년 10월 8일. 계약기간이 만료된 초대 배성서 감독의 뒤를 이어 김영덕을 제 2대 감독으로, 강병철을 수석코치로 영입했다. 김영덕 감독은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 출신으로 한국실업야구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날렸고, 지도자로서도 한화그룹 창업자 김종희 회장의 각별한 신임 속에서 북일고를 창단 3년 만에 우승시킨 명장이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역시 충청권을 연고로 창단한 OB 베어스를 초대 챔피언으로 이끌기도 했다. 수석코치 강병철 역시 1984년에 롯데 자이언츠의 기적적인 역전 우승을 이끈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단 3명(김영덕, 강병철, 김응용)뿐이던 우승감독 중 2명을 묶어 구축한 ‘초호화’급 코칭스태프였다. 김영덕 감독과 강병철 코치는 각기 투수와 야수 출신으로서 가진 최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시너지를 발휘했다. 그 결과 1988년 MBC 청룡과의 시즌 개막 2연전을 모두 쓸어 담은 것을 시작으로 시즌 초반부터 선두권을 질주하며 스포츠신문 1면을 ‘돌풍’ ‘비상’ 같은 단어와 함께 장식하곤 했다. 1988년 4월 17일 | 이동석 프로 통산 4번째 노히트노런 기록 수립 (해태전, 선동열) 1988년 4월 17일. 이동석이 프로야구 4호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당대 최강이라 불리던 해태 타이거즈와 적지인 광주 무등구장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선동열과의 선발 맞대결을 벌여 세운 기록이라는 점에서 더 가치가 높았다. 사실 김영덕 감독은 이상군, 한희민 등 기존 양대 에이스를 축으로 놓고 나머지 투수들을 특히 강세를 띠는 팀을 상대할 때 ‘천적’으로 내보내는 변칙운용을 했는데, 해태를 상대로만 3승을 올린 이동석 외에도 삼성전 4승의 김대중, OB전 3승 김홍명 등이 그런 투수들이었다. 1989년 10월 6일 | 이강돈 시즌 최다안타 기록 수립(137개) 1990년 8월 4일 | 강석천 프로 통산 4번째 싸이클링히트 기록 수립(태평양전) 1990년 8월 4일. 강석천이 4호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했다. 87년에 이강돈이 2호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한 데 이어, 팀 내 두 번째 기록이었다. 팀 창단과 함께 프로선수생활을 시작한 젊은 선수들의 기술과 경험이 정점에 이르고 있었고, 선수 각자의 강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운영이 결합되면서 갖가지 신기록과 진기록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1991년 12월 11일 | 장종훈 타격 4관왕(홈런, 타점, 장타율, 최다안타) 그 밖에 1989년 고원부, 1991년과 1992년에는 이정훈이 타격왕에 올랐고, 1987년 이정훈과 1989년, 1990년 이강돈이 최다안타왕 타이틀을 석권하는 등 타격부문 타이틀을 이글스 선수들이 휩쓸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물론 장종훈이었는데,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 동안 홈런, 타점, 장타율 부문 타이틀을 독식했고 1991년에는 최다안타, 최다득점까지 휩쓸며 무려 타격 5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투수들은 상대적으로 덜 두드러졌는데, 그것은 당대에 선동열이라는 독보적인 투수가 해마다 투수부문 타이틀을 거의 모두 휩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글스에서는 송진우가 1990년에 구원왕에 오른 데 이어 1992년에는 19승과 17세이브로 다승과 구원왕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하는 등 레전드의 서막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선수 각자의 기량이 절정으로 오른 데 더해 김영덕-강병철 코칭스태프의 노련한 운영이 더해지면서 팀 성적도 정상권을 달렸다. 정규시즌 승률 기준으로 1989년과 1992년에는 1위였고 1988년과 1991년에는 2위, 다소 부진했던 1990년에는 4위였으며, 그 1990년을 제외한 4년 동안 내내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강팀의 자질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우승의 문턱에서 고배를 마셨는데, 무엇보다도 선동열을 중심으로 김정수, 김봉연, 김준환 등이 활약한 해태 타이거즈에게 번번이 막혔기 때문이다. 한국시리즈에서만 3차례 해태와 싸워 1988년 2승, 1989년 1승만을 얻어낸 아쉬운 결과였다. 1992년은 그런 의미에서 빙그레 이글스와 김영덕 감독에게 특별히 더 안타까운 해였다. 그 해의 한국시리즈 파트너였던 롯데 자이언츠는 선수층도 해태와 비교할 바는 아니었고, 정규시즌 성적도 이글스가 11경기차로 앞섰으며,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와 5차전까지 혈전을 벌이느라 롯데는 이미 지친 상태였다. 롯데를 이끌던 감독이 바로 전 시즌까지 빙그레 수석코치를 지낸 강병철이라는 점도 김영덕 감독에게 자신감을 실어줄 만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글스 최강 투수 송진우가 1차전은 선발로, 2차전은 구원투수로 나서 2패를 당하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며 예상 밖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결국 시리즈 전적 1승 4패로 빙그레 이글스는 또 한번 우승의 문턱에서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번번히 우승 트로피를 눈앞에 두고도 차지하지 못한 빙그레 이글스는 뭔가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말하자면 ‘단기전에 강한, 우승시킬 수 있는 감독을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1984년과 1992년, 단 두 차례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두 번 모두 우승에 성공했던 강병철 감독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1993년, 빙그레 이글스는 김영덕 감독 취임 이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부상 등으로 인한 주전 선수들의 이탈이었다. 홈런, 타율, 최다안타 타이틀을 휩쓸던 장종훈과 이정훈, 이강돈이 나란히 부상 속에 17홈런(장종훈)과 2할대 초반 타율(이정훈, 이강돈)로 부진했고, 투수 한희민이 삼성으로 트레이드된 데다 거물 신인 투수 구대성 마저 부상으로 2승에 그쳤던 것이다. 결국 61승 61패, 승률 5할의 5위로 시즌을 마칠 수 밖에 없었다. 1993년 11월 1일 | 구단 명칭 한화이글스로 변경 1993년 11월 1일. 구단은 ‘빙그레 이글스’에서 ‘한화 이글스’로 구단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1주일 뒤인 11월 8일, 김영덕 감독에 이어 강병철 감독을 대 감독으로 영입했다.

세대교체(1994~1998)

1994년 4월 10일. 이글스는 광주 개막전에서 ‘한화 이글스’라는 새 이름으로 첫 경기를 치렀다. 강석천의 홈런에 힘입어 한용덕과 송진우가 승리와 세이브를 나눠 갖는 깔끔한 출발이었다. 하지만 시즌은 순탄치 못했다. 노장진이 임의탈퇴 이후 현역으로 입대하였고, 송진우와 구대성이 나란히 부진한 가운데 군에 입대한 정민철 마저 원정경기에 나서지 못하면서 극심한 투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정훈, 장종훈, 강정길, 이강돈 등 중심타선도 동시에 부진해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1994년 10월 24일 | 정민철 시즌 2관왕(탈삼진, 방어율) 그러나, 6월 이후 임무를 맞교대한 선발 송진우와 마무리 구대성이 각자의 자리에서 안정감을 보이기 시작했고, 정민철이 군 복무라는 불리한 조건에서도 평균자책점(2.15)과 탈삼진(196개) 타이틀을 따내며 14승을 보태준 것, 그리고 한용덕이 16승으로 중심을 잡아준 덕분에 공동 3위의 성적으로 상위권에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포스트시즌에서는 준플레이오프에서 해태를 2연승으로 따돌렸지만, 플레이오프에서 그 해 돌풍의 팀 태평양 돌핀스에게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내주며 시즌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 해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는 시즌이 마무리된 뒤에 벌어졌는데, 바로 이정훈의 트레이드였다. 1994년 12월 2일. 91년과 92년 2년 연속 타격왕에 올랐던 팀의 간판타자 이정훈과 베테랑 투수 장정순을 삼성으로 보내고, 젊은 야수 정경훈과 정영규를 받는 2대 2 트레이드가 단행됐다. 이정훈은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였을 뿐 아니라 강한 승부 근성으로 특별한 사랑을 받아온 선수였기에 팬들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세대교체라는 시대적 요구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이 트레이드는 베테랑 선수를 내주고 젊은 유망주들을 데려왔다는 점, 그 중에서도 팀의 상징적인 선수였던 이정훈을 내보냈다는 점에서 강병철 감독이 설정한 ‘세대교체’의 팀 운영 방향을 엿볼 수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세대교체 과정에서 기존 베테랑 선수들과 팬들의 반발은 불가피한 것이며, 신예들의 활약만이 그것을 잠재울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야심차게 영입한 신인들이 기대만큼 성장을 못해주었다는 점이다. 90년대 들어 지연규, 구대성, 길배진, 신재웅, 이성갑 등 해마다 대학야구의 거물투수들이 기록적인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지만, 구대성이 2년차인 1994년부터 조금씩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 것을 제외하면 제대로 주전으로 자리를 잡은 선수가 많지 않았다. 1995년, 보충된 신인 없이 기존 멤버들의 성적이 1년의 세월만큼 한 발씩 뒤로 물러서면서 팀 순위도 뒷걸음 쳤다. 정규시즌6위. 1995년 10월 25일. 1996년 신인 1차 지명회의가 30일에는 2차 지명회의가 열렸다. 1차에서 홍원기와 고졸 우선 지명으로 이상열과 심광호, 2차 지명에서는 이영우, 송지만, 김수연, 임수민 등을 선택해 입단시켰는데, 그 선수들이 한두 해 사이에 주전급으로 성장해 팀 전력 운용에 숨통을 틔워주었다. 창단 초기 이후 처음 맞는 최대의 ‘신인풍년’이었다. 1996년 개막 초기부터 강병철 감독은 홍원기, 송지만, 이영우, 임수민 등 신인을 주전 라인업에 꾸준히 배치하는 한편 이상군, 진정필, 김상국 등 마지막 남은 창단멤버들을 엔트리에서 제외했다. 결국 김상국은 현대로 옮겨 선수 생활을 이어갔지만, 이상군과 진정필은 은퇴를 택했다. 1996년 한화는 시즌 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4년차 구대성이 다승, 평균자책점, 구원까지 투수 3부문을 석권한 대활약과 신인 송지만, 홍원기, 이영우가 강석천과 더불어 규정타석을 채우며 2할 대 후반의 타율로 기여해준 데 힘입어 3위로 정규시즌을 마무리했다. 1997년 5월 23일 | 정민철 프로 통산 9번째 노히트노런 기록 수립 1997년 5월 23일. 정민철이 두산 베어스와의 대전 홈경기에서 역대 9번째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특히 그 경기에서는 안타 뿐만 아니라 단 한 개의 사사구도 내주지 않았지만, 8회 1사 후 심정를 헛스윙 시킨 공을 포수 강인권이 빠뜨리며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으로 출루를 허용하며 역사적인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퍼펙트게임’이 너무나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비록 한국 최초의 퍼펙트게임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노히트노런 만으로도 팬들에게 기쁨을 주는 청량제 같은 대기록이었다. 1997년, 이글스는 7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는데, 팀평균자책점(4위), 팀타율(6위)보다 낮은 성적이 이전과는 다른 경기양상이었다. 처음 3할대 타율로 활약하며 삭발까지 불사했던 주장 강석천이 고군분투했지만 이강돈, 강정길 등이 은퇴하거나 코치수업을 받기 시작하면서 남긴 공백이 크게 작용했다. 1998년 7월 8일. 전반기가 끝나고 올스타전이 열리던 바로 그 날 한화 이글스는 후반기의 지휘권을 이희수 수석코치에게 맡겼다. 그 해 처음 도입된 외국인선수들 중 트라이아웃캠프 랭킹 1위 거포 마이크 부시가 불과 입단 한 달여 만에 옆구리 부상을 당해 전열에서 이탈한 것을 시작으로 주력선수들의 줄부상과 슬럼프가 이어지면서 최하위로 처진 상황이었다. 이글스는 시즌중 감독대행 체제와 전반적인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 속에 7위로 씁쓸하게 시즌을 마무리했다. 강병철 감독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적지 않은 신인들을 발굴하고 기용해 재도약의 저력을 비축하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노출된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절반의 아쉬움 또한 남겼다.

20세기 마지막 챔피언(1999~2000)

1998년 10월 19일. 이희수 감독대행을 제 4대 감독으로 승격, 선임했다. 그만큼 한화 이글스의 선수들을 잘 아는 지도자는 없다는 점, 그래서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빨리 극복하고 팀을 안정화시킬 적임자라는 점이 크게 고려된 인선이었다. 이희수 감독은 북일고 초대 감독을 지낸 뒤 1987년 빙그레 이글스에 코치로 합류해 김영덕-강병철 두 감독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며 코치, 선수들과도 두루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99년의 한국 프로야구는 양대 리그로 치러졌다. 8개 구단을 드림리그(두산, 롯데, 현대, 해태)와 매직리그(삼성, 한화, LG, 쌍방울)로 나누고, 같은 리그 팀끼리는 연간 20경기, 다른 리그 팀과는 18경기씩을 치르도록 편성했다. 그리고 각 리그 1위 팀이 다른 리그 2위 팀과 플레이오프를 치러 한국시리즈 티켓을 나누는 크로스토너먼트 방식의 포스트시즌을 치르도록 되어 있었다. 1999년 5월 21일. 삼성과의 대전 홈경기에서 이희수 감독의 심판폭행사건이 벌어졌다. 3대 2, 1점차로 쫓긴 9회 초 2사 만루, 2스트라이크 3볼에서 구대성이 삼성 빌리 홀에게 던진 가운데 낮은 코스의 직구를 이영재 주심이 볼로 판정해 동점을 허용했고, 판정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구대성이 퇴장 당한 채 결국 6대 3으로 역전패해 9연패 째를 당하자 이희수 감독이 경기장을 나가던 심판을 때리는 불상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선두 삼성에 9경기차로 멀찍이 뒤진 채 매직리그 3위로 처져있던 한화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하지만 이글스 선수들은 오히려 그 사건을 계기로 날을 세우고 뭉쳤고, 감독이 더그아웃에 들어오지 못한 12경기에서 7승 5패로 선전하며 반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뒤로 짧게는 2연승, 길게는 10연승을 반복하며 6할 대 승률로 후반기를 내달렸고, 결국 10월 4일에는 매직리그 2위 자리를 확보하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했다. 1999년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매직리그 2위 한화 이글스와 드림리그 1위 두산 베어스의 플레이오프가 열렸다. 한화(.554)는 승률 종합 4위였고, 두산(.598)은 양 리그를 통틀어 1위였지만 결과는 뜻밖에 한화의 4연승이었다. 구대성, 송진우, 이상목, 그리고 은퇴 2년 만에 현역으로 복귀한 이상군이 1승씩을 책임졌고, 로마이어, 데이비스, 장종훈, 강석천, 백재호가 홈런을 날리며 뒤를 받친 결과였다. 한편 매직리그 1위 삼성과 드림리그 2위 롯데가 벌인 또 다른 플레이오프는 7차전까지 이어졌는데, 거기서도 모든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롯데가 기적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거의 매 경기 물고 물리는 혈전에 선수 뿐 아니라 팬까지 가담한 신경전을 벌이느라 한국시리즈에 도달했을 때 롯데 자이언츠는 이미 기진맥진해있었다. 1999년 10월 29일 |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롯데전 4승 1패) 1999년 10월 22일부터 한화 이글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1992년에 이은 두 번째 한국시리즈 맞대결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승자가 달랐다. 1차전은 정민철의 호투와 백재호, 최익성의 홈런으로 6대 3. 2차전은 송진우의 호투와 조경택의 홈런으로 4대 3으로 잡아낸 뒤 3차전은 롯데 기론의 호투에 밀려 내줬지만 다시 4차전과 5차전을 정민철과 구대성의 호투 속에 2대 1, 4대 3으로 각각 승리하며 드디어 한화 이글스가 감격스러운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한국시리즈 MVP는 1승 3세이브의 구대성이었다. 창단 후 14번째 시즌을 맞던, 그리고 고참급 선수들이 대략 10년 이상의 커리어를 쌓아올리던 그해는 이글스 선수들의 갖가지 누적기록들이 꽃을 피운 해였다. 1999년 6월 30일. 우완에이스 정민철이 광주 해태전에서 역대 최연소 100승 투수(만 27년 3개월)가 됐고, 9월 20일에는 33세의 노장 좌완 송진우 역시 100승을 채우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좌완 100승 투수가 됐다. 당시만 해도 7년 후배 정민철에게 이미 추월당한 것으로 보였던 송진우가 뒷날 정민철을 비롯한 그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울 200승이라는 전인미답의 고지에 오를 줄은, 그 때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한 발 앞선 5월 23일, 연습생 출신 4번 타자 장종훈이 253호 홈런을 날리고 6월 6일에는 863타점 째 동점 2점 홈런을 날려 이만수가 가지고 있던 통산 최다홈런과 최다타점 기록을 넘어섰다. 그 역시 그 뒤로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스스로 거듭 깨고 또 깨면서 개척하게 되는 신기록 행진의 출발점이었다. 그밖에 신예 외야수 송지만은 22홈런과 20도루를 성공시켜 20-20클럽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고, 외국인선수 데이비스는 한 술 더 떠 30-30클럽 회원이 됐다. 어쨌든 막내구단 한화 이글스는 우여곡절 많던 20세기를 헤집고 나와 최후의 챔피언이 됐다. 2000년 1월 21일. 정민철이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고, 4월에는 전 시즌 14승 투수 이상목이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고 전열을 이탈했다. 결국 2000년, 그렇게 해외진출과 부상으로 빠진 선수들의 공백을 극복하지 못한 이글스는 매직리그 3위, 통합 7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2000년 5월 18일 | 송진우 프로 통산 10번째 노히트노런 기록 수립(해태전) 2000년 11월 8일. 한화는 두산과 LG에서 감독을 지내며 1994년 LG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던 이광환 감독을 제 5대 감독으로 선임했다. 계약기간은 2년이었다. 2000년 12월 18일. 구대성의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블루웨이브스 입단 조인식이 열렸다. 이로서 1년 사이에 한화 이글스는 오른손 에이스와 왼손 마무리를 잃게 됐다.

방황과 모색(2001~2004)

구대성의 일본 진출은 신임 이광환 감독에게 최악의 비보였다. 이광환 감독은 비록 야수 출신이었지만 강력한 클로져를 축으로 하는 탄탄한 마운드를 우선시했다. 1994년 LG 우 승도 선발-계투-마무리의 철저한 분업화와 전문화를 통해 역량을 극대화시키고 안정화시킨 투수운용체계인 ‘스타시스템’ 덕분이었다. 하지만 국내 최강 마무리투수의 빈자리는 상대적으로 크게 작용했고, 이광한 감독이 구상하였던 분업과 전문화에 어려움을 겪으며 결국 후반부의 치열한 접전 상황에서 뒷문의 불안함이 노출되었다. 2001년 4위, 2002년에는 7위로 시즌을 마무리했지만 승률은 2001년 .473, 2002년 .461로 별 차이가 없었다. 2001년 10월 31일 | 김태균 2001년 신인왕 2001년, 1차 지명신인 김태균이 .335의 타율에 20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1987년 이정훈에 이어 이글스의 두 번째 신인왕이 됐다. 그나마 그 해에 4강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김태균과 두산 이적생 김종석 등 예상하지 못했던 타자들의 분발 덕분이었다. 2002년 11월 6일. 한화 이글스는 이광환 감독 대신, ‘언젠가는 감독이 될 사람’으로 꼽히던 창단멤버 유승안 수석코치를 제 6대 감독으로 선임했다. 15년 역사의 이글스가 최초로 자팀 선수 출신 감독을 배출한 것이다. 그 시점에 유승안 감독을 선택한 것은 분명한 방향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는 팀을 지휘하려면 무엇보다도 팀과 선수들에 대해 가장 잘아는 사람이 한시라도 빨리 키를 잡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승안 감독 역시 강병철 감독 시절부터 누적된 ‘세대교체’라는 과제 풀기에 나섰다. 장종훈과 강석천이라는 노장들 대신 신인 김태균과 이범호를 주전 1루수와 3루수로 기용한 것은 그 뒤로 10여 년 간 팀 내야진의 기본 틀로 이어진 대표적인 유승안 감독의 유산이다. 투수진에서도 2003년에 1차 지명으로 입단시킨 안영명에게 꾸준히 기회를 주고, 2004년에 외야수 송지만을 현대에 내주고 투수 권준헌을 데려와 불펜 에이스로 활용하며 투수진 재건을 시도하기도 했다. 2003년 5월 3일 | 장종훈 프로 통산 첫번째 1,700안타 기록 수립(SK전) 2003년 5월 18일 | 송진우 프로 통산 첫번째 2,200이닝 돌파(롯데전)및 좌완 최초 1,600 탈삼진 기록 달성 2003년 5월 3일. 장종훈이 프로 통산 첫번째로 1,700안타 기록을 수립한데 이어 보름 뒤인 5월 18일에는 송진우가 프로 통산 첫번째로 2,200이닝 돌파 및 좌완 최초로1,600 탈삼진이라는 전인미답의 대기록을 달성하였다. 하지만, 팀 성적은 2003년에는 5할에 가까운 승률(63승 2무 65패. 승률 .492)의 5위로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이듬해인 2004년에는 7위로 내려앉으며 유승안 감독의 2년 임기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4년 10월 4일. 두산 베어스에서 물러나있던 김인식 감독이 한화 이글스의 제 7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계약 기간은 2년이었다. 강병철 감독 이후 2년의 계약기간은 새 감독이 팀을 파악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재생 공장(2005~2009)

2005년 5월 5일. 조성민이 입단했다.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부상으로 은퇴한 뒤 한국에서 방송 해설을 하다가 김인식 감독의 권유로 다시 유니폼을 입은 것이다. 조성민은 그 해 8월 15일 수원 현대전에 첫 등판해 1.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첫 승을 거두는 등, 계투로서 19.1이닝 2승 2패 4홀드를 기록했다. 십 수 년 간 부상과 부진, 은퇴, 복귀를 반복하다가 2005년 20세이브를 기록한 지연규 역시 아마 시절의 명성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십 여 년 째 부진의 늪에 빠졌다가 한화로 건너와 2005년과 2006년에 각각 10승과 16승을 올린 문동환. 그 외에도 강동우, 최영필 등 버려졌던 선수들을 발굴해 재활용함으로써 팀 전력 곳곳에 뚫린 구멍을 메우면서 김인식 감독은 ‘재활공장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5년 11월 8일. 롯데와 SK를 거친 베테랑 유격수 김민재와 4년간 총액 14억 원의 입단계약을 맺었다. 구단 사상 최초의 외부 FA 영입이었다. 김민재는 계약기간을 마치고 은퇴할 때까지 해마다 거의 전 경기에 출장하며 수비진 전체의 안정화를 이끌었다. 2006년 3월 1일.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뛰던 구대성이 복귀했다. 앞서 2002년에는 정민철도 2년간의 일본 생활을 접고 돌아와 있었다. 구대성은 지연규와 임무를 교대해 마무리투수로 투입됐고, 정민철 역시 선발투수로 다시 자리를 잡았다. 물론 구위와 체력은 해외진출 전의 전성기와 비교할 수 없었지만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얻은 노련함으로 타자들을 요리하며 충분히 자신의 몫을 해냈다. 2006년에는 신인지명회의에서 ‘수술경력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앞 순위 팀들이 외면한 동산고 왼손 투수 류현진을 2차 1순위로 지명해 입단시켰다. 하지만, 류현진은 타고난 유연한 몸과 빠른 습득력, 그리고 선배 송진우, 구대성의 조언으로 급성장하며 첫 해에 곧바로 201.1이닝 18승과 2.23(평균자책점)을 기록해 신인왕과 시즌 MVP, 투수부문 골든글러브를 동시에 석권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렇게 재활용 선수, 복귀한 노장 선수, FA 영입 선수들과 그동안 꾸준히 성장한 김태균,이범호, 류현진 등의 젊은 선수들이 합세하고 ‘덕장’ 김인식 감독을 중심으로 결집한 덕에 한화 이글스는 다시 한 번 상승세에 오를 수 있었다. 2005년 정규리그를 4위로 마친 뒤 준 플레이오프에서 SK를 4승 2패로 누르고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다. 비록 플레이오프에서는 두산에게 3연패를 당하며 멈춰서야 했지만, 4년만의 포스트시즌 복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2006년에는 정규시즌을 3위로 마친 뒤 준플레이오프에서는 기아를 2승 1패, 플레이오프에서는 현대를 3승 1패로 누르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한국시리즈에서는 삼성에게 1승 1무 4패로 밀리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1992년 이후 무려 14년 만에 밟아보는 한국시리즈 무대였다. 그 뒤로도 2007년까지는 시즌을 3위로 마치며 꾸준히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정상권 도약을 노리는 듯 했다. 하지만 풍부한 경험을 지닌 노장들과 새로운 신인 발굴을 통한 신구세대의 조화와 외부 영입을 통한 끊임없는 경쟁체제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는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2005년 9월 15일 | 장종훈 은퇴경기(기아전) 2005년 9월 15일. 기아와의 대전 홈경기가 장종훈의 은퇴경기로 치러졌다. 19시즌 통산 1950경기 출장과 340홈런의 대기록을 남겼고, 등번호 35번은 구단 최초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그 밖에 지연규가 2006, 문동환과 조성민이 2007, 권준헌이 2008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2006년 8월 29일 | 송진우 프로 통산 첫번째 200승/2,800이닝 투구(기아전) 2006년 11월 2일 | 류현진 2006년 신인왕/MVP 동시 석권 반면 2007년, 정영일, 김광현과 더불어 고교야구 빅3로 꼽히던 장필준이 1차 지명을 거부하고 해외진출을 택했다. 2003년 이후 안영명, 윤규진, 송창식, 양훈, 김혁민 등 유망한 투수들이 더러 들어오긴 했지만 노장들이 약해지는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구대성은 2007년 시즌 중반을 기점으로 구위 하락이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정민철도 2007년에 12승을 올린 뒤로는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송진우 역시 2006년 8월 29일에 통산 200승의 대기록을 수립할 무렵에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 했다. 2009년 9월 12일 / 정민철 은퇴경기(히어로즈전) 2009년 9월 23일 / 송진우 은퇴경기(LG전) 2009년 9월 12일과 23일에는 정민철과 송진우가 나란히 은퇴경기를 가졌고, 각각 의 등번호 23번과 21번은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유격수 김민재 역시 그에 앞서 2008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한화 이글스를 넘어서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레전드 정민철과 송진우의 빈자리는 컸다. 임시방편으로 채워 넣었던 전력들이 소진되는 사이 새로운 힘을 만들지 못하면서 한계를 드러낸 것이 2008년이었다. 그 해 한화 이글스는 5위로 처져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되었고, 2009년에는 류현진-김태균-이범호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최하위로 쳐졌다. 창단 첫 해 이후 한화 이글스가 처음 경험하는 ‘최하위’ 성적이 주는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2009년 9월 24일. 한화 이글스는 김인식 감독을 고문으로 위촉하고,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로 있던 대전고 출신 한대화를 제 8대 감독으로 선임했다. 계약기간은 3년이었다.

바닥 다지기(2011~2014)

2009년 11월 13일. FA 자격을 얻은 김태균이 일본 프로야구 롯데 마린스와, 11월 19일에는 이범호가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입단계약을 맺었다. 한화는 내야진과 중심타선의 기둥 두 개를 한꺼번에 잃은 셈이었다. 그러자 애초에 ‘마운드 재건’을 취임 일성으로 내놓았던 한대화 감독도 우 선 야수진의 공백부터 메워야 했다. 만년 유망주 투수 김창훈, 조규수를 두산으로 보내고 이대수를 데려와 수비 공백에 대비했고, 안영명, 김다원, 박성호를 기아로 보내고 장성호, 이동현, 김경언을 데려와 공격력을 보강했다. 두산과 넥센에서 방출된 정원석과 전근표도 영입했다. 하지만 이대수를 제외하면, 겨울훈련을 거른 장성호를 포함한 대부분이 당장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3루와 유격수를 오가던 송광민 마저 갑작스레 입대하며 야수진도 혼란을 면하지 못했다. 게다가 기대했던 외국인 투수 카페얀은 승리 없이 11패, 데폴라도 6승 12패에 그치며 결국 2010년에도 한화 이글스는 8위로 2년연속 최하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2011년에도 전망은 어두웠다. 특별히 보강된 선수도 없었고, 주전 야수 김태완과 정현석의 입대로 빈틈은 더 커졌다. 하지만 11승의 에이스 류현진을 중심으로 김혁민, 양훈, 안승민 등 젊은 투수들이 각각 5~7승씩을 보태고, 시즌 후반기에 들어와 마무리를 맡은 외국인투수 바티스타가 3승과 10세이브로 뒷문을 안정시키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야수진에서도 이대수가 처음 3할을 넘기며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버가 됐고, 중심타선의 최진행,장성호, 가르시아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한 방씩을 터뜨리며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9월 13일 기아와의 대전 홈경기에서 관중 40만을 돌파한 것은 이제 바닥을 찍고 반등한다는 희망과 더불어 그런 화끈한 경기양상들 덕분이었다. 결국 2011년은 공동 6위로 시즌을 마쳤고, 시즌이 끝난 뒤에도 그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희망적인 소식들이 많이 들려왔다. 2011년 9월 13일 | 사상 첫 40만 관중 돌파(기아전) 2011년 11월 20일. 넥센과 LG를 거친 베테랑 불펜 투수 송신영을 3년간 13억 원에 영입했다. 2005년 김민재 이후 2번째 외부 FA영입이었다. 12월 12일에는 일본에서 김태균이 복귀했고, 12월 20일에는 메이저리그 124승 투수 박찬호가 입단했다. 그 해의 성적을 바닥으로 놓고 계산하면 2012년에는 4강권 진입도 가능하다는 전망이 쏟아졌다. 2011년 12월 12일 | 김태균 입단(연봉 15억) 2011년 12월 20일 | 박찬호 입단(연봉 2,400만원) 하지만 정작 2012년에 많은 가능성들에 어두운 그림자가 내비쳤다. 국내투수들은 류현진이 9승, 박찬호가 5승, 김혁민 안승민 양훈 등 신진들도 그럭저럭 5승 안팎으로 뒤를 받치며 기대치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의 현상유지를 했다. 하지만 가르시아 대신 데려온 투수 배스가 단 2경기 1.2이닝 만에 무려 9점을 내주고 방출되고 그를 대체한 션 헨 마저 14경기에서 8점대 평균자책점에 2패만을 기록한 것은 예상할 수도 대처할 수도 없었다. 2011시즌 뒤 은퇴한 신경현 이후 확실한 주전 포수가 없었던 것도 마운드 불안의 한 원인이었다. 타선에서도 김태균이 타격왕에 올랐지만, 가르시아가 빠진데다 최진행과 김태완이 동시에 부진하며 예상을 빗나가게 했다. 특히 홈런이 극적으로 줄었는데, 71개의 팀 홈런은 1994년 이후 가장 적은 수였다. 2012년 6월 19일 | 대전구장 그랜드오픈 2012년 8월 27일. 39승2무64패의 부진한 성적으로 시즌 중 한대화 감독이 물러났다. 강병철 감독에 이어 구단 사상 두 번째 중도하차였다. 갑작스레 지휘봉을 물려받은 한용덕 감독대행이 14승 1무 13패로 무난하게 남은 시즌을 운영했지만, 결국 최하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2012년 12월 10일 | 사상 첫 50만 관중 돌파(SK전) 2012년 10월 2일. 관중 50만을 돌파했다. 전 해에 40만 관중을 처음 넘긴 데 이어 1년만에 다시 20% 이상 늘려놓은 신기록이었다. 팀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팬들의 기대는 점점 더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2012년 10월 8일. 10회 우승 경력의 명장 김응용 감독을 제 9대 감독으로 선임했다.하지만 앞서 한대화 감독이 부임하자마자 김태균과 이범호의 해외 진출이라는 비보를 접했듯, 김응용 감독도 11월 29일에는 박찬호의 은퇴 발표, 12월 10일에는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입단이 확정 소식을 만나야 했다. 2012년 12월 26일. 오랜 숙원이었던 서산연습장이 준공됐다. 야외전용구장과 실내연습장, 숙소, 식당, 교육장 등을 완비한 2군 전용 훈련시설을 갖추면서 드디어 ‘2군 육성 시스템 보유 팀’으로써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2013년, 류현진의 공백은 여전히 크게 느껴졌다. 2년간 7승과 18세이브를 올리며 꾸준히 활약한 바티스타에 메이저리그 통산 19승 경력의 이브랜드가 가세했지만 바티스타는 7승, 이브랜드는 6승에 그쳤다. 지난 해 5홀드 16세이브를 기록했던 마무리 안승민이 단 2홀드로 부진해 투수진 전체가 흔들린 탓도 있었다. 신생팀 NC 다이노스가 합류하며 9구단 체제로 운영된 그 해 한화는 개막 13연패를 시작으로 고전한 끝에 NC에 마저 밀려 최하위로 시즌을 접어야만 했다. 2013 시즌 뒤 구단은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2013년 11월 16일에는 내부 FA 이대수,한상훈, 박정진 모두를 잔류시켰고, 17일에는 국가대표 테이블세터 정근우(SK)와 이용규(기아)를 역시 FA 계약을 통해 영입했다. 그리고 2014년부터 외국인선수 보유한도가 3명으로 늘어나자 기존의 바티스타와 이브랜드를 모두 내보낸 뒤 투수 두 명(케일럽 클레이와 앤드류 앨버스)과 야수 한 명(펠릭스 피에)을 영입해 전력을 보강했다. 2014 시즌 초 정근우, 이용규, 피에, 김태균으로 이어지는 상위타선이 힘을 발휘하며 예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지만 시즌을 마무리할 때는 다시 9위로 돌아와 있었다. 무엇보다도 클레이와 앨버스, 그리고 시즌 중 교체된 타투스코 까지 외국인투수들이 도합 11승 밖에 만들어주지 못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야수진에서는 어깨 부상으로 수비를 대신 지명타자로만 출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용규와 기존의 지명타자 요원들의 활용폭 제한, 그리고 외야의 어수선한 수비 요인이 컸다. 2014년에 한화 이글스는 2013년보다 7승을 보탠 49승 3무 77패, 하지만 마찬가지로 9위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새출발(2015~)

2014년 10월 25일, 한화 이글스 구단은 계약기간이 만료된 김응용 감독 대신 김성근 감독을 제 10대 감독으로 영입하였다. 계약기간은 3년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취임 직후부터 원래 6명이었던 트레이닝코치를 9명으로 확충하고, 일본인 코치들을 비롯해 30여 명에 가까운 매머드급 코치진을 구성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14년 10월 28일, 대전 한밭구장에서 취임식을 가진 김성근 감독은 바로 다음날인 29일부터 곧바로 일본 오키나와로 이동해 11월 27일까지 시즌 마무리 훈련을 지휘했다. 그리고 12월 1일부터 1월 14일까지 한 달간의 비활동기간 휴식기를 마친 뒤 1월 15일부터 2월 3일까지 일본 고치에서 동계전지훈련을 진행했다. 전지훈련은 2014년 12월 11일에 입단식을 가진 신입 FA 배영수, 권혁, 송은범을 포함한 선수 58명과 코칭스태프 28명이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